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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이란 나이

쥴리T 2020. 12. 2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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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나이로 여자가 24살.


초중고 12년을 끝내고 바로 대학을 가고 휴학 없이 4년을 공부하고 졸업하면 딱 한국 나이 24살이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거지만

한국 나이 24살이면

만 나이로 22살..

이제 막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너무나 꽃다운, 어리고 예쁜 나이다.



내가 24살이 되던 해는

그러니까 내가 대학교 4학년이 끝나고 졸업을 앞둔 그때는


우리나라가 아주 암울했던.. 지금 젊은 세대들은 말로만 들었을 법한

IMF 때였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가 대학 졸업할 때만 해도 기업에서 각 대학에 채용 원서 몇 장을 배분해주면

학과 사무실에서 몇 명한테 그 원서를 주고 

그 몇 명이 원서를 써서 기업에 제출만 하면 거의 다 채용 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언니의, 언니 친구들의 쉽게? 취업하는 모습을 본 대학생이었던 나는

취업에 대한 큰 걱정은 안해봤던거 같다. 



그러나 단 2년 사이에 

세상이 뒤집힌 것이다.





안정적이라고 모두가 선호했던 수많은 대기업, 은행, 증권회사 같은 곳에서도 명예 퇴직이란 이름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해고를 당했고

튼튼하다고 믿었던 회사들이 부도가 나서 문을 닫고..

무수히 많은 가장들이 실직자가 되었다.


그 즈음에 우리 부모님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드셨던 기억이 난다.



국립대를 다니며 과외로 학비와 용돈을 다 벌어가며 공부했던 언니와는 달리


나는


등록금 비싼 사립대를 다녔고

서울에서 따로 자취를 하고 있었고

과외 같은 아르바이트도 잘 구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부모님 "등골브레이커"였다.


그런 내가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드디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을.. 취업할 때가 되었는데.....

세상에..


IMF 라는게 터져버린 것이다.




전공이 '식품영양학과'였던 나는

취업이 어려우니까 일단 대학원에 진학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2년이나 더 부모님께 부담이 되는 것도 싫었고,


"여자가 가방끈이 길면 시집 못간다" 는 엄마의 말도 


막연하게 20대 초반의 나도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던 걸까..

좀 거슬렸다.

(결혼은 하고 싶었나보네. ㅋㅋ)



요즘 세상에 이런 말 하면?? 어우....




어쨋든

그래서 진학은 포기하고 

전공을 살려서 

영양사로 취업하려고 마음을 먹고 준비했다.



영양사는 기업이나 학교, 병원 같이 단체 급식을 하는 곳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인데

일반적인 규모의 단체 급식소에서는 영양사가 한 두 명 정도밖에 필요하지 않으니

그다지 자리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일반 환자의 단체 급식을 위한 '급식 영양사'도 있지만

의사, 약사, 간호사와 함께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데 참여하는 "임상 영양사" 라는 것도 있다.


수술, 약물과 함께 식이요법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해서 식이 처방을 하는 임상 영양사...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임상 영양사의 꿈을 갖고 

서울에서 TOP 3 병원 중 한 곳에 수련 영양사 시험을 봤다.

(수련 영양사는 의사도 인턴이 있는 것처럼 병원에서 일하는 영양사도 인턴이 필요하다고 해서 생겨난 자리라고 한다.)


6명을 뽑는 시험이었는데 몇 십 명이 지원했던 걸로 기억한다.. 

당당히 합격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수석으로 합격했더라? (깨알 자랑 ㅋㅋ)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여 년 전에 수련 영양사는 

난이도가 낮은 잡다한 일을 하며 업무를 배우는 학생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월급이 고작 20만원이었다.

월급이라기 보다는 교통비 정도 주는 거였다.



20만원이면

대중교통 없는 시간대에 출퇴근 할 때 택시 타고, 스타킹 사고(그 시절엔 또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 했다.. 왜?-_-;;), 대중교통 차비 하기에도 

모자란 돈이었다.


그래도 어찌 됐던 성실하게 일하고 과제도 하고 일을 배워나갔다.

(임상 영양과장님이 수련들을 대상으로 수업도 하시고 과제도 내주시고 발표도 시키고 그랬었다.)




그렇게 수련 영양사 과정은 1년이었다. 

6명 중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두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 때문에 나에게 할당된 업무가 더 늘어서 너무 힘들어했던 기억도 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윗사람 눈치 보며 깨지기도 하고, 힘들어서 화장실 가서 울기도 하고

현장에서 갖가지 어려움을 몸도 체험? 해보던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년....


생생하게 기억나는 한 조각..



수련 영양사의 수많은 업무 중에 

 

정기 검진 하러 오는 당뇨 환자의 식사를 담아주는 일이 있다.


그 당시 당뇨 환자의 정기 검진은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수련 영양사를 끝으로 나는 영양사를 하지 않았으니...)


새벽에 병원에 와서

공복 상태에서 1차 채혈

환자에 따라 처방 받은 아침식사를 하고, 식사 직후 2차 채혈 

2시간 후에 3차 채혈을 해서 

혈당의 변화를 관찰하는데.


이때 병원에서 정확하게 처방 받은 칼로리가 계산된 식사를 우리 수련 영양사들이 퍼주는 것이다.


밥과 국, 반찬을 각각 정확한 양으로 저울에 재서 환자들한테 담아드려야 한다.


처방받은 열량에 따라 메뉴별로 얼만큼을 담느냐도 외우고 있어야 하고 

저울까지 동원해서 정확한 양으로 담아주는게 관건.



별거 없어 보이는? 이 업무를 영양사 선생님께 배우는데..



내가 저울에 올려놓은 밥그릇에 밥을 담는 모습을 보던 

그 영양사 선생님이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보더니

밥 담던 주걱을 빼앗아 본인이 밥그릇에 담는 걸 보여주면서


"너 나중에 시아버지 밥 차릴 때도 이렇게 담아 드릴꺼니?"



라고 하셨다.



아마도 환자들한테 밥을 담아줄 때 좀 더 깔끔하고 예쁘게 담아주라는 의미로 말한 거였겠지..




그땐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안이 벙벙하고 

아.. 내가 뭘 잘못했나 보구나... 하면서 듣기만 했는데.



그런데 꼭 저런 표현으로 얘기했어야 했을까.


저 얘기를 했던 영양사 선생님도 그당시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많아봐야 30대 초중반...?


생각해보면 24살이란 나이에..


결혼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 없는데

시아버지 밥 차릴꺼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꺼고


(나야 물론 자취생이라서 내 밥은 내가 차려먹긴 했지만)


태어나 그냥 쭉 학생이기만 했던 24살 짜리가

식사를 차려본 경험이 몇 번이나 되겠나...



저 말을 듣고 참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요렇게 소담스럽게 담아봐~ 그러면 먹는 환자들도 기분좋자나~

라고 했으면 됐을 것을...



시아버지 밥은 꼭 며느리가 퍼야 되나? 

며느리는 시아버지 밥 차리는 사람인가?

엄마 밥도 내 밥도 예쁘게 담을 수도 있는 거고

시아버지 밥은 시아버지가 직접 담을 수도 있는 거고 (우리 집은 우리 아빠가 직접 밥을 푸신다.)

그런거 아닌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만약에 24살, 대학 갓 졸업한 여학생에게 

이런 식의 발언을 한다면???


성인지 감수성이 없다고 즉각 반발을 사게 될텐데.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던 그분..

시댁 어른들과 함께 사셨던가.. 그래서 그렇게 말했었나...시아버지 밥 차리는게 지겨우셨나..

지금은 어떻게 사시는지,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지금도 며느리는 밥을 예쁘게 담을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진다..





참고로.

결혼한 지 18년 차 인 

난 


어쩌다보니

시아버지께 밥을 한번도 퍼드린 적이 없다. 하.하.하

그 때 배웠던 예쁘게 밥 담는 법??을 시아버지께 보여드릴 기회가 없었네? 하.하.하.하.






지금 그때의 영양사 선생님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나이가 들어버린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기억을 남겨주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그러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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